인터뷰

'안 봐도 비디오'인 눈에 선한 글을 쓰는 사람들

[인터뷰] <눈에 선하게> 화면해설작가 김은주·홍미정

2022. 11. 02 (수) 13:14 | 최종 업데이트 2022. 11. 09 (수) 14:23
영화나 드라마, 각종 예능까지, 영상 콘텐츠를 소리만 들으며 감상해본 적 있는가? 액션 장면에선 누가 때리고 맞고 있는지 알기 어렵고, 코믹 장면에선 시각적 요소를 알지 못하니 웃을 포인트를 놓치게 된다. 곳곳에 힌트를 숨겨두는 스릴러, 미스터리 장르에선 더 말할 것도 없다. 

글로 그 빈틈을 채워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화면해설작가다. 이들은 대사와 영상 사이 행간을 해설하는 글을 쓴다. 이렇게 완성된 글은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화면해설방송으로 완성된다. 이걸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콘텐츠라고도 부른다. 시각장애인들은 이런 작업 덕분에 드라마와 영화 등 콘텐츠를 보다 실제에 가깝게 즐길 수 있게 됐다. 
더위가 한 풀 꺾인 선선한 날씨의 초가을, 가장 먼저 촬영장에 나타난 유재석 - 예능 <런닝맨>, 홍미정 작가 

마시멜로 같은 하얀 곤포 사일리지가 줄줄이 놓여있는 녹음 짙은 들녘을 지나 앞서 가던 트럭이 좁은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자 모니카도 뒤따른다. - 영화 <미나리>, 김은주 작가 

단오가 천천히 우산을 들어 올리자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남학생의 얼굴이 드러난다. -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김은주 작가 

화면해설작가들은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모든 움직임과 상황을 풀어 설명한다. 화면해설방송이 2001년 <전원일기>부터 시작됐으니, 벌써 21주년이 됐지만, 이 직업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화면해설작가 다섯 명은 이 직업을 더 알리고 싶어서 <눈에 선하게>란 일 에세이를 함께 써내려갔다. 

'안 봐도 비디오'가 되는, 눈에 선한 글을 어떻게 써왔을까? 저자들 중 김은주, 홍미정 작가에게 직접 만나 들어봤다. 
  
- 먼저 자기소개 해주세요. 

은주/ 안녕하세요. 화면해설작가 김은주입니다. TV구성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라디오 작가를 거쳐서 화면해설작가로 전업했어요. 20년 넘게 글로 밥 먹고 살고 있는 작가입니다.

미정/ 안녕하세요. 홍미정입니다. 화면해설작가와 라디오 작가 일을 겸업하고 있어요. TV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다큐멘터리를 주로 했는데요. 밤새는 일이 반복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밤 안 새면서 글 쓰는 일을 찾다가 라디오로 건너왔는데 일의 강도가 약한 대신에 TV보다 페이가 적더라고요. 그렇게 사이드잡을 찾다가 화면해설작가 일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투잡한지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 <눈에 선하게> 책 출간 축하합니다! 사실 '화면해설작가'라는 직업이 있는 것도 잘 몰랐거든요.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그러셨을 것 같고요. 두 분 모두 화면해설작가라는 직업을 언제 처음 알게 되셨나요?

은주/ 라디오를 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시각장애인 대상 프로그램에서 화면해설작가가 진행하는 코너의 원고를 정리하면서 화면해설 대본을 처음 접했고 그때부터 이 직업에 호기심이 생겼죠. '드라마 대본과 조금 다른 글을 쓴다는데…' 도대체 뭘까 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 이상으로 궁금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2011년에 라디오 작가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을 크게 했어요. 아쉬운 페이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죠. 그때 화면해설작가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미정/ 저도 비슷해요. '일을 더 해야 하는데' 같은 계기로 시작했어요. 당시에 은주 작가님께서 하던 프로그램에 들어가면서 화면해설작가라는 직업을 (덕분에) 처음 알게 됐고, 교육생을 모집하기에 지원했어요. 종일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주 한 번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는 시스템이라 더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었어요. 그런 시스템 덕분에 프리랜서 분들이 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또 작가 출신을 우대한다는 공고 때문인지 방송작가분들이 많았고요.


- 책 표지 속 작가 소개에 5분 작가님들의 대표작을 남겨두신 점이 인상 깊었어요. 각자 했던 작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과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요.

은주/ 쉬운 것이 없어요. (웃음) 저는 전쟁영화를 많이 작업했는데 최근에는 <봉오동전투>와 <백두산>을 했어요. 전쟁영화를 소리로만 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또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지 구분 자체가 어려워요. 또 미정 작가와 공동작업한 <공작> 같은 첩보영화도 정말 어렵고요. 저희끼리 우리 노트북을 포렌식하면 국정원에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다고 농담할 정도로 배경이 되는 장소(북한, 중국 등)와 극중 사용된 총기를 검색했어요. 이렇게 대사와 효과음 사이에 디테일하게 시각장애인의 이해를 돕는 모든 과정이 힘들어요. 실제 대본엔 없는 것들이거든요. 소리로만 들어도 보이는 것처럼 이해되게 쓰는 일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매 순간 힘들어요.

미정/ 저도 다 힘들었어요. (웃음) 하지만 이번에 힘들었던 것을 잊어버려야 다음 것을 쓸 수 있는 것 같도 같아요. 그래선지 지난번에 다른 작품을 했을 때 뭔지 몰라서 몇 시간씩 뒤졌던 것을 또 검색하고, 지금 하는 작품에 다시 쓰면서 허탈하게 웃을 때도 잦고요. 또 요즘은 스포츠 예능이 많잖아요. 저는 운동과 거리가 먼 편이라 종목별로 기술이나 용어를 검색하고 박진감 넘치는 표현을 쓰는 게 더 어려워요. 요즘은 팔씨름 예능인 <오버 더 톱>를 작업하고 있는데요. 설, 추석처럼 명절에만 한 번씩 본 정도가 전부인 팔씨름을 해설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닌 거죠. 

은주/ 그래도 좋아요. 화면해설작가 일을 하면서 아는 것이 너무 많아졌는데, 이런 지식과 상식들이 일상에서 다 은근히 도움되더라고요. (웃음)
 
  
- 시각장애인분들의 화면 이해를 돕기 위해 작업하면서 맞는 단어, 어울리는 표현 하나하나 찾아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그렇게 찾는 표현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과 찾으면서 어려웠던 점을 들려주세요.

은주/ 매 순간 찾아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열심히 찾았다고 해서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요. 마감에 닥쳤을 때 마지막으로 급하게 쓴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들 때도 자주 있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제가 쓴 글을 스스로 만족한 적은 없어요. ‘다른 표현 방법은 없었을까?’ 하고 늘 고민해요. 성우분들이 녹음한 저희 글을 말로 들으면, 또 느낌이 완전 다르거든요.

미정/ 쓰고 나면 잊는다고 했지만 '풍금'에 관한 기억은 오래가네요. <밥 블레스 유>라고 여성 예능인들이 출연한 음식 예능을 작업했을 땐데요. 출연진들이 교외에 있는 카페에 갔는데 거기에 풍금이 있더라고요. 피아노를 친다던 한 출연자가 풍금을 연주했어요. 풍금은 피아노와 구조가 달라서 '"이걸 이렇게 해야!" 소리가 난다'며 특정 부분을 만지는데 그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검색어도 제대로 입력하는데, 몰라서 '풍금 구조'를 검색했더니 건반, 파이프 등의 이야기만 잔뜩 이더라고요. 피아노를 전공한 지인에게 묻고 나무위키를 비롯한 온갖 것을 뒤져서야 적당한 표현을 찾아냈어요. 사실 콘텐츠에서는 스쳐가는 장면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한 번 꽂히면 어떻게든 찾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힘들어요.


- 반대로 일하다 보면, 다시 기회가 주어지거나 시간을 돌려서 새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아쉬웠던 것도 있으실 것 같아요. 그 작품이 무엇인지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은주/ 전부 다요. 답은 영상에 있으니까 답을 찾기 위해 수십 번씩 돌려보고 최선을 다했지만, 못 보는 것들이 있어요. 틀린 부분을 남들은 몰라도 저는 알잖아요. 그리고 저희가 작업할 때 보는 영상 중에는 워터마크(로고)가 찍혀서 오는 것들이 많아요. 그 작품이 극장에 걸리고 나서 다시 보면, 제가 쓴 해설의 아쉬운 부분들이 보이죠. 워터마크에 가려서 안 보였던 부분들이 보이면서 그 아쉬운 점들이 눈에 들어와요. 

미정/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게 쓴 것들은 다시 쓰라고 하면 못 쓸 것 같아요. <악녀> 같은 작품은 시작부터 몇 분 동안 여러 명이 죽는 격투 장면이 이어지거든요. 누가 누굴 찔렀는지, 어떤 집단이 이기고 있는지 구분해서 표현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평소에 그런 잔인한 작품을 즐기는 편이 아닌지라, 더 힘들기도 했고요.

은주/ 추리극, 수사물은 아쉽기도 하면서 힘든 대표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요. 이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은 알겠지만, 화면에 숨겨둔 게 상당히 많거든요. 이걸 어디까지 해설할지, 그냥 넘어가는 게 맞을지 고민을 계속 하게 돼요. 특히 영화는 엔딩까지 보고 쓰지만, 드라마는 저희도 똑같이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매주 마감에 맞춰 바쁘게 작성하다 보니 어려워요. 그리고 화면해설하기 가장 힘든 장르는 코미디예요. 웃어야 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하고 웃음 포인트를 잡는다는 게 진짜 보통 일이 아닙니다.
 
- 작가님들은 어떤 직장에 소속돼서 일을 받는지, 아니면 개인사업자로 일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미정/ 작가님마다 다를 텐데 저와 함께 책을 낸 작가들은 한국시각장애인협회 미디어접근센터(최근 '한국시각장애인미디어진흥원'으로 이름 변경) 소속입니다. 프리랜서와 직장인의 중간 단계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다른 단체에서 일하시는 화면해설작가분들도 있고요. 작품의 장르와 길이 그리고 작가의 연차에 따라서 페이가 달라요. 한 편당 페이를 받고요.

은주/ 지상파 방송의 화면해설 작업은 거의 다 거기서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화면해설작가가 30명이 채 안 돼요. 초창기에는 일이 힘들고 페이는 적어서 투잡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화면해설 작품의 의무 제작 편수가 늘어나고 일이 많아지면서 이 업종 자체는 더 유망할 거라고 봐요. 영상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 있는 그림이랑 미술관, 박물관의 전시품도 해설하는 등으로 일의 수요가 계속 늘고 있거든요. 연극, 뮤지컬 등의 공연을 해설하는 일도 새로 생겨나고 있고요.

(왼쪽부터) 김은주, 홍미정 화면해설작가 / 사진=오승혁 기자
- 미정님께서는 방송작가로 일하시다가 화면해설작가 일을 겸업하신 지 10년이 넘었는데요. 계속 작가로 일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꾸준히 '다른 일 없나' 하고 눈을 돌리는 스타일이에요. 라디오 작가만 열심히 하자니 힘들어서 화면해설작가를 병행했는데 이게 잘 맞는 것 같아서 겸업하고 있어요. 대학교 전공은 심리학인데 4학년 때 출판사에서 출간 직전에 책을 미리 읽어보는 모니터 요원으로 일했어요. 그때 과제로 받았던 책이 방송작가가 쓴 책이었거든요. 그러면서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되었고 바로 교육원에 등록했고, 수료 후에 작가가 됐죠. 


- 은주님은 자연과학도를 꿈꾸시다가 TV 구성작가, 라디오작가를 거쳐서 지금 이 일을 하고 계세요. 사실 오디오로 모든 것을 전달해야 하는 라디오 작가로 했던 일의 결 역시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소리로 전달하는 것은 같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라디오는 오디오만 신경 쓰면 됩니다. 애초에 비디오, 영상의 개념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화면해설작가의 일에서는 영상이 우선시되거든요. 대본도 많이 달라요. 라디오는 글 위주인데 TV와 영화의 대본은 영상 위주로 설명이 이뤄져요. 라디오는 조금 더 문학적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문장력이 좋고 글을 잘 쓰는 분이 유리하죠. 그런데 화면해설 일에서는 요약력이 중요해요. 대사와 대사 사이 몇 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상황을 요약, 정리해야 하니까요. 


- 끝으로 두 분이 생각하는 10년 뒤 일의 전망이 궁금해요. 

은주/ 전망은 밝아요. 문제는 제가 10년 뒤에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거죠. (웃음) 라디오 작가 일과는 다르게 오감을 다 써야하거든요. 귀로는 듣고 눈으로 영상을 보고 손으로는 글을 쓰면서 모든 감각을 다 사용해서 일하니까 체력적으로 지치는 작업이 많아요. 

미정/ 10년 후에는 화면해설작품의 편수와 시장 자체가 확장될 것은 당연하리라고 생각해요.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주말에 재방송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본방송 때 화면해설을 들으면서 보고 싶다는 의견이 꾸준히 많이 나오고 있기도 하고요. 방송계에 있는 분들이 화면해설까지 전체 제작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실 정도로 인식이 달라지면 좋을 것 같아요. 

은주/ 시각장애인은 우리 영화만 보고 청각장애인은 해외 영화만 본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더빙과 화면해설로 작업되는 외국 영화의 편수가 적다는 이야기죠. 이런 격차가 점점 줄어들면서 화면해설작품도 계속 늘어날 것 같습니다. 
 
오승혁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