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두른 빨간 띠, 정치투쟁, 파업, 점거…
노동조합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개 이런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래서일까. ‘노조’의 연관 키워드 빅데이터를 살펴보면 부정적 키워드의 비중이 무려 79%에 달한다.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권익 향상을 위해 조직된 단체에 반감을 갖는 이 아이러니는 어디서 기인한 걸까.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이하 새로고침)는 그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됐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본질을 잃어버린 기존 노조 생태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보겠다는 것. 공정, 합리, 경험 등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MZ세대의 가치관과도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다짐이다. 이들에게 ‘MZ노조’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빨간 머리띠와 조끼 대신, 맨투맨에 백팩을 메고 보통의 직장인들 곁에 서서 ‘즐겁고 행복하게 노동할 권리’를 외치는 이들. 새로고침의 송시영 부의장(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동조합 위원장)을 봄이 성큼 가까워진 어느 날, 시청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얼마 전 새로고침 노조협의체가 닻을 올렸어요. LG전자, 서울교통공사, 금호타이어, 한국가스공사 등 각 기업의 소수노조가 합심한 거죠. 특히 ‘MZ노조’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는데요.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아직까지는 새로고침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어떠한 변화를 말하기에는 좀 이른 단계인 거 같아요. 하지만 주변의 반응을 통해 체감하는 건 있죠. 제가 소속된 서울교통공사의 경우에는,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회사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할 말은 해야한다는 분위기가 많이 올라왔어요. 이전엔 그렇지 못했죠. 사측도 이런 움직임을 인지하고 있고요. 아직은 상황을 주시하는 단계에만 그친다는 게 좀 아쉽지만요.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덕에 다른 소수노조들도 무척 관심을 보일 것 같은데요. 추가적으로 합류 의사를 밝힌 노조는 없나요?
삼성디스플레이 열린노동조합이 새롭게 합류해서 현재 9개 노조가 협의체에 함께하고 있어요. 한 곳은 일단 가입을 유보했고요. 아직 어딘지 밝히기는 좀 어렵지만, 현재 3~4곳의 노조가 가입을 고려하고 있어요.
이렇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걸 보니, 새로고침이 말그대로 노동계에 F5(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어쩌다 이런 협의체를 결성하게 됐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공공기관의 경우에는 대부분 사측이 정부기관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노사정(노동자·기업·정부) 상생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것에 대해 더 힘을 실어서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새로고침 소속 노조가 대부분 기성 노조에 비해 노동운동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건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함께 모여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면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2월 21일 서울 용산구 동자아트홀에서 진행된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발대식에서 유준환 의장(왼쪽에서 4번째), 송시영 부의장(왼쪽에서 5번째)을 비롯한 협의회 위원장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제공=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노동계에는 양대노총(한국노총, 민주노총)의 존재감이 무척 커요. 그들과 어떻게 차별화된 길을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크셨을 것 같은데.
기존 노총들은 지나치게 정치 세력화 돼버렸어요. 그런 모습은 노조가 추구해야 할 본질과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마땅한 대우를 받으며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는 게 노동조합의 주된 역할이잖아요. 그런 본질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양대노총과는 차별화 된 부분이겠죠. 그리고 저희 세대가 유행에 굉장히 민감하잖아요. 트렌디한 방식으로 노사 문화를 개선하고, 노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꿔나가고 싶어요.
그럼 새로고침이 가장 시급하게 다뤄야 할 노동현안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현 정부가 올 상반기 노동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요. 찬성하는 부분도 일부 있지만, 반대하는 내용들도 상당히 많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 입장을 정확히 밝히고 목소리를 내서, 노사정이 상생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게 가장 큰 목표입니다.
노동개혁안에서 반대하는 내용은 뭔가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주 69시간 근무제’가 대표적이죠. 한 주에 69시간 일하면 다른 주에는 그보다 덜 하는 식으로 유연하게 근무할 수 있다는 게 정부측 주장이에요. 물론 그런 제도가 정말 필요한 사업장도 있어요. 하지만 이를 법제화하겠다면서 사측이 제도를 악용할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할 지에 대해 실질적 방안을 마련하지 않았죠. 기존 ‘주 52시간 근무제’ 안에서 근무 시간 유연화를 추진한다면 모를까, 근무 시간을 늘려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새로고침은 과격한 투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활동들을 해나가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런데 여러 시위 현장을 보면, 갈수록 과격해지는 사례가 굉장히 많잖아요. 새로고침도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되진 않을까요?
그런 기존의 시위 방식이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이 서울시청 근방이나 광화문, 서울역 등에 가보면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거리를 점거하는 시위를 흔히 볼 수 있어요.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폭력적이거나 불법적인 방식을 취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민들은 과연 그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쟤네 또 불편하게 통행 방해하네, 보나마나 정치적인 이야기하겠지...’ 이렇게 여기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시위는 단체행동권을 이용해 본인들이 겪고 있는 부당함을 알리고 호소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시민들의 반감을 산다면, 본질을 잃게 되고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새로고침은 시민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실질적인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노동 운동 방식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시도해볼 생각이에요.
‘새로운 시도’로 어떤 활동들을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새로고침은 이제 막 첫 발을 뗀 상태라, 대신 서울교통공사 올바른 노조의 활동을 일례로 소개해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위 대신 토크 콘서트를 개최한 적이 있거든요. 당시 공채 역차별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함이었죠. 어떻게 하면 이 이슈를 사람들에게 잘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공정 문화제’를 기획하게 된 건데요.
길거리에서 시민들을 초청하고, 옥상정원에 함께 모여 ‘공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회사에 불거진 역차별 이슈도 자연스럽게 다뤘고요. 초대된 분들 중 상당수가 취업준비생들이어서, 토크 콘서트가 끝난 뒤엔 취업 컨설팅도 해줬죠. 취준생은 미래의 노동자가 될 분들이니, 노조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새로고침도 앞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계속 해 볼 생각이에요.
새로고침은 교섭권이 없는 소수노조로 구성됐어요. 이 부분이 활동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교섭 창구 단일화’라는 제도가 있어요. 이에 따라, 1개의 노조만 사측과 교섭을 할 수 있습니다. 교섭권은 대부분 거대 기득권 노조가 가져가게 되고요. 교섭권이 있는 노조는 ‘공정대표의무’ 조항에 따라 소수노조를 차별하거나 배제해선 안 되지만, 소수노조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게 현실이죠. 새로고침은 입법 관계자라면 그게 누구든 적극적으로 만나서 저희 입장을 전달하고, 관련 법 개정의 필요성을 꾸준히 강조하려 합니다.
지난 2월 21일 서울 용산구 동자아트홀에서 진행된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발대식 (제공=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요즘 MZ세대들은 노동 운동에 관심이 적어요. 반감을 가진 이들도 상당히 많고요. 2030세대 직장인들의 노조 가입을 유도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듯한데요.
노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건 명백히 기존 노조의 잘못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팔을 걷어붙인거고요. 지속 가능한 노동 운동이 이어지려면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인식을 개선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MZ세대는 실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요. 그렇기 때문에 교섭 창구 단일화 제도의 개선에 대해서도 계속 강조하는 거예요. 직접 교섭을 할 수 있어야 실질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협의체 소속 노조끼리 조합 복지를 공유하는 방안도 확대해나갈 예정이에요. 각 조합마다 공유차량 서비스 할인, 호텔 제휴 할인, 놀이공원 이용권 등 제휴 복지가 있거든요. 그런 혜택들을 협의체 소속이라면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공유해서, 사측이 제공해주지 않는 복지를 풍부하게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입니다.
잡플래닛에 방문하는 수백만 명의 직장인들은 직장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일하기 좋은 회사를 만나게 되길 꿈꿔요. 취준생들도 마찬가지고요. MZ세대를 대표하는 노조로서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을 안 하는 인구는 거의 없어요. 다들 노동자이거나 혹은 예비 노동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노동의 대가인 임금을 벌기 위해서이고, 이를 위해 우린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냅니다.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노동 환경을 열악하지 않게 개선해달라고, 마땅한 대우를 해달라고 외칠 수 있는 건 노동조합밖에 없어요. 노동자의 유일한 대변인인 셈이죠.
전 항상 ‘직원이 있어야 회사가 있고, 회사가 있어야 직원이 있다’고 말해요. 회사가 잘되기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라죠. 그렇기에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랫동안 일할 수 있도록 직원들을 존중하고 대우해주길 바라는 거예요.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때, 회사의 발전에 제대로 기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노조는 세상에 꼭 필요한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저희가 나서서 고쳐갈 테니,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