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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헤즈볼라에 납치됐던 PD, 그 이후 벌어진 일
[인터뷰] 구수환 이태석 재단 이사장
2023. 11. 03 (금) 14:32 | 최종 업데이트 2023. 11. 17 (금) 14:51
"와, PD님 눈빛 장난 아니심.."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된 직후, 20여 년 전 제작된 다큐멘터리 한 편이 소환됐다. 때는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장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터 한복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그 곳에 한국인 PD가 서 있다! 이어서 하마스의 창시자 야신이 카메라 앞에서 전쟁의 이유를 설명하고, 자살폭탄테러를 앞둔 하마스 대원이 자신의 신념을 말한다. 20여 년 전 한국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이라니, 놀랄 수밖에.
2001년 KBS에서 방영된 '이슬람, 끝나지 않은 전쟁'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 등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하마스에 헤즈볼라까지 직접 만나 전쟁의 민낯을 전한 이, 구수환 전 KBS PD다. 취재 중 헤즈볼라에 납치까지 됐었으니,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취재해 전쟁의 참혹함과 부당함을, 힘없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세상에 알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된 직후, 20여 년 전 제작된 다큐멘터리 한 편이 소환됐다. 때는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장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터 한복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그 곳에 한국인 PD가 서 있다! 이어서 하마스의 창시자 야신이 카메라 앞에서 전쟁의 이유를 설명하고, 자살폭탄테러를 앞둔 하마스 대원이 자신의 신념을 말한다. 20여 년 전 한국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이라니, 놀랄 수밖에.
2001년 KBS에서 방영된 '이슬람, 끝나지 않은 전쟁'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 등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하마스에 헤즈볼라까지 직접 만나 전쟁의 민낯을 전한 이, 구수환 전 KBS PD다. 취재 중 헤즈볼라에 납치까지 됐었으니,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취재해 전쟁의 참혹함과 부당함을, 힘없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세상에 알렸다.
요즘 세대들에겐 낯선 얼굴일 수 있지만, 1990~200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구 PD는 익히 유명한 언론인이다. 한국 최초의 탐사 고발 프로그램 '추적 60분'을 통해 수많은 사회 문제를 고발했다. 그가 '추적60분' 진행을 맡았던 2000년대 초중반은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황금기로 불린다. PD들의 활약에 'PD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정말 치열하게 했어요. 한번은 동호철교 중간에 교각과 철교를 잇는 나사가 풀려있다는 거예요. '증거가 있느냐'고 했더니 같이 가보재요. 열차가 다니지 않는 새벽1시에 플래시를 들고 철교 위를 걸어서 중간 지점으로 가봤어요. 바람은 불지, 아래는 한강이 흐르고 다리가 떨려서 움직이질 못하겠는데 그래도 어떻게 해요, 제보자는 앞에서 걸어가고 있고, PD가 못 간다고 할 순 없잖아요. 벌벌 떨면서 갔어요. 철교 밑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나사가 다 풀려있어 깜짝 놀랐죠.
충격적인 모습을 촬영해야 하니까, 며칠 후 오후 4시경에 제보자와 다시 갔어요. 그런데 낮에는 열차가 다니잖아요. 4~5분마다 열차가 오는데, 열차가 올 때는 '열차' 소리지르고 철교 대피소로 피해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걷고, 그렇게 중간까지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문제의 교각에 도착한 후 사다리를 타고 교각으로 내려가는데, 열차가 지날 때마다 철교가 흔들리고, 정말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후회를 엄청 했어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비좁은 공간에서 조명 켜고 촬영하고, 제보자와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움직일 용기가 안 나는 거예요. 40여 분 찍고 올라왔는데, 다리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움직이질 못하겠더라고요.
방송이 나가고 나서 난리가 났죠. 생각해보세요. 내가 매일 타고 다니는 지하철 철교에 나사가 풀려있다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취재하기 좋았던 것 같아요. 요즘은 허락 없이 지하철에 들어가 촬영하면 난리가 낫을 겁니다. 당시에는 방송이 나가면 사회적 관심도 컸고 즉각적인 변화나 반응도 있었고요. 그만큼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죠."
"정말 치열하게 했어요. 한번은 동호철교 중간에 교각과 철교를 잇는 나사가 풀려있다는 거예요. '증거가 있느냐'고 했더니 같이 가보재요. 열차가 다니지 않는 새벽1시에 플래시를 들고 철교 위를 걸어서 중간 지점으로 가봤어요. 바람은 불지, 아래는 한강이 흐르고 다리가 떨려서 움직이질 못하겠는데 그래도 어떻게 해요, 제보자는 앞에서 걸어가고 있고, PD가 못 간다고 할 순 없잖아요. 벌벌 떨면서 갔어요. 철교 밑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나사가 다 풀려있어 깜짝 놀랐죠.
충격적인 모습을 촬영해야 하니까, 며칠 후 오후 4시경에 제보자와 다시 갔어요. 그런데 낮에는 열차가 다니잖아요. 4~5분마다 열차가 오는데, 열차가 올 때는 '열차' 소리지르고 철교 대피소로 피해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걷고, 그렇게 중간까지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문제의 교각에 도착한 후 사다리를 타고 교각으로 내려가는데, 열차가 지날 때마다 철교가 흔들리고, 정말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후회를 엄청 했어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비좁은 공간에서 조명 켜고 촬영하고, 제보자와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움직일 용기가 안 나는 거예요. 40여 분 찍고 올라왔는데, 다리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움직이질 못하겠더라고요.
방송이 나가고 나서 난리가 났죠. 생각해보세요. 내가 매일 타고 다니는 지하철 철교에 나사가 풀려있다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취재하기 좋았던 것 같아요. 요즘은 허락 없이 지하철에 들어가 촬영하면 난리가 낫을 겁니다. 당시에는 방송이 나가면 사회적 관심도 컸고 즉각적인 변화나 반응도 있었고요. 그만큼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죠."
그가 제보를 그냥 지나쳤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KBS PD로 지낸 33년, 대부분의 시간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을까. 하지만 처음부터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PD가 된 건 아니었단다.
"솔직히 방송국에 관심을 가진 건 좋은 직장이라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사명감이나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고요. 입사 2년차 때 지역 방송국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어느 날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서류 뭉치를 들고 찾아왔어요. 당시 막내라 그 분들 만나는 건 제 몫이었죠.
사연은 이래요. 시에서 지은 임대주택에서 살면서 매달 돈을 냈대요. 당시 그분들의 주장은 '임대료를 내고 5년을 살면 내 집이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5년이 지나자 돈을 내고 아파트를 구입하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대요. 억울하고 막막해 항의도 하고 소송도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요.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이 방송국이었어요. 억울함을 알리고 싶었던 거죠. 서럽게 우는 우르신들을 보니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관련 부서를 찾아가 취재가 아니라 싸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아요. 왜 힘없는 서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야하는 지 화가 나더라고요.
방송이 나가는 날 동네 목욕탕에 가서 방송을 봤어요. 그때 집에 TV가 없었거든요. 30분 방송이 끝났는데 옆에서 '속이 후련하다' '공무원이 무책임하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뿌듯함을 느낀 것 같아요. 이틀 후, 할머니 할아버지가 과일바구니를 들고 회사에 찾아왔어요. 손을 꼭 잡고는 문제 해결은 안됐지만 '힘내라'는 격려 전화가 많이 온다며 연신 고맙다는 거예요. 입사 후 처음으로 느낀 언론의 영향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 이후 억울한 사연, 부정부패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방송을 보고 저 친구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낸 거죠. 이게 추적 60분 PD로 살게 된 출발점이에요."
"솔직히 방송국에 관심을 가진 건 좋은 직장이라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사명감이나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고요. 입사 2년차 때 지역 방송국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어느 날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서류 뭉치를 들고 찾아왔어요. 당시 막내라 그 분들 만나는 건 제 몫이었죠.
사연은 이래요. 시에서 지은 임대주택에서 살면서 매달 돈을 냈대요. 당시 그분들의 주장은 '임대료를 내고 5년을 살면 내 집이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5년이 지나자 돈을 내고 아파트를 구입하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대요. 억울하고 막막해 항의도 하고 소송도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요.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이 방송국이었어요. 억울함을 알리고 싶었던 거죠. 서럽게 우는 우르신들을 보니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관련 부서를 찾아가 취재가 아니라 싸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아요. 왜 힘없는 서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야하는 지 화가 나더라고요.
방송이 나가는 날 동네 목욕탕에 가서 방송을 봤어요. 그때 집에 TV가 없었거든요. 30분 방송이 끝났는데 옆에서 '속이 후련하다' '공무원이 무책임하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뿌듯함을 느낀 것 같아요. 이틀 후, 할머니 할아버지가 과일바구니를 들고 회사에 찾아왔어요. 손을 꼭 잡고는 문제 해결은 안됐지만 '힘내라'는 격려 전화가 많이 온다며 연신 고맙다는 거예요. 입사 후 처음으로 느낀 언론의 영향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 이후 억울한 사연, 부정부패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방송을 보고 저 친구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낸 거죠. 이게 추적 60분 PD로 살게 된 출발점이에요."
치열하게 싸워가며 방송을 만들었다. 약자들의 억울한 사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솔직히 시사고발PD로 살아가는 것이 쉽진 않았어요. 협박, 법적 분쟁, 압력, 회유, 그중에서 감내하기 어려웠던 건 법적 분쟁이었어요. 다른 건 개인적으로 이겨내면 되는데,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형사 고소, 민사 소송을 제기하면 PD 개인이 대응을 해야 해요. 소송이 제기되면 보통 2~3년이 걸려요. 생각해보세요. 검찰, 법원을 들락거리는 마음이 어떻겠어요. 오죽했으면 석사 논문을 법적 분쟁에 대해 썼을까요. 그래서 PD들이 고발 프로그램을 기피해요. 그런데 저는 20년을 했거든요. 그래도 정말 신바람 나게 일을 했어요.
최근에 이유를 찾았어요. 사명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행복했기 때문이더라고요. 온갖 고생을 하면서 왜 행복했을까? 누군가를 도와주고, 도움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표정을 보면서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됐어요. 이를 통해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삶에 만족하게 되더라고요. 일을 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거예요. 추적60분은 억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프로그램이었다고 전 생각해요. 저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을 배운 것 같아요."
"솔직히 시사고발PD로 살아가는 것이 쉽진 않았어요. 협박, 법적 분쟁, 압력, 회유, 그중에서 감내하기 어려웠던 건 법적 분쟁이었어요. 다른 건 개인적으로 이겨내면 되는데,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형사 고소, 민사 소송을 제기하면 PD 개인이 대응을 해야 해요. 소송이 제기되면 보통 2~3년이 걸려요. 생각해보세요. 검찰, 법원을 들락거리는 마음이 어떻겠어요. 오죽했으면 석사 논문을 법적 분쟁에 대해 썼을까요. 그래서 PD들이 고발 프로그램을 기피해요. 그런데 저는 20년을 했거든요. 그래도 정말 신바람 나게 일을 했어요.
최근에 이유를 찾았어요. 사명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행복했기 때문이더라고요. 온갖 고생을 하면서 왜 행복했을까? 누군가를 도와주고, 도움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표정을 보면서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됐어요. 이를 통해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삶에 만족하게 되더라고요. 일을 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거예요. 추적60분은 억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프로그램이었다고 전 생각해요. 저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을 배운 것 같아요."
일은 행복했지만, 그것도 잠시, 의지와 상관없는 인사 발령으로 '추적60분'을 떠나게 됐다.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했거든요. PD들이 외면하는 프로그램에 남겠다고 하는데 내보낸 이유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회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고요. 그런데 인생은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때의 분노가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책임PD와 방송 진행자를 그만두고 평PD로 있던 날, 우연히 인터넷 기사 제목을 하나 보게 됐어요.
'수단의 슈바이처 선종'. 한 사제가 아프리카에서 8년 동안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인데요.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가게 만든 건, '수단'이라는 두 글자였어요. 당시 수단이 내전 중이었거든요. 종군기자로 5년을 일했으니, 전쟁터를 너무 잘 알잖아요.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데, 신부가 왜 전쟁터를 찾아갔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종군기자로 활동한 경험이 저와 이태석 신부를 묶어 준 거예요."
마음속 분노가 가득할 때, 이태석 신부를 만났다. 전쟁터를 잘 알기에, 이태석 신부의 선택과 삶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이렇게 2010년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가 탄생했다. <울지마 톤즈>는 개봉 넉 달 만에 5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주인공 이태석 신부는 의대를 졸업하고 전쟁이 한창인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로 달려가 환자를 돌보고, 학교를 세웠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다 뒤늦게 발견된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 큰 파장과 감동을 안겼다.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했거든요. PD들이 외면하는 프로그램에 남겠다고 하는데 내보낸 이유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회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고요. 그런데 인생은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때의 분노가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책임PD와 방송 진행자를 그만두고 평PD로 있던 날, 우연히 인터넷 기사 제목을 하나 보게 됐어요.
'수단의 슈바이처 선종'. 한 사제가 아프리카에서 8년 동안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인데요.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가게 만든 건, '수단'이라는 두 글자였어요. 당시 수단이 내전 중이었거든요. 종군기자로 5년을 일했으니, 전쟁터를 너무 잘 알잖아요.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데, 신부가 왜 전쟁터를 찾아갔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종군기자로 활동한 경험이 저와 이태석 신부를 묶어 준 거예요."
마음속 분노가 가득할 때, 이태석 신부를 만났다. 전쟁터를 잘 알기에, 이태석 신부의 선택과 삶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이렇게 2010년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가 탄생했다. <울지마 톤즈>는 개봉 넉 달 만에 5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주인공 이태석 신부는 의대를 졸업하고 전쟁이 한창인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로 달려가 환자를 돌보고, 학교를 세웠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다 뒤늦게 발견된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 큰 파장과 감동을 안겼다.
"분노가 가득할 때 이태석 신부를 만났어요.
종군기자 경험이 저와 이태석 신부를 묶어 준 거예요.
사실 <울지마 톤즈>는 강력한 고발 영화였어요."
종군기자 경험이 저와 이태석 신부를 묶어 준 거예요.
사실 <울지마 톤즈>는 강력한 고발 영화였어요."
"사실 이건 강력한 고발 영화였어요.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존경받는 삶인지 말하고 싶었어요.
영화가 개봉됐는데,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울어요. 왜 우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전국의 극장을 찾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물어봤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하나는 반성의 눈물이었어요. 저분의 삶을 보니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 또 하나는 그리움의 눈물이었어요. 저런 리더가 우리 옆에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그리움과 반성의 눈물이더라고요.
20여 년 간 많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언론이 사회 문제를 그렇게 고발했는데, 사회가 더 나아졌느냐, 변하지 않은 거예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어요. 대형 사건이 날 때마다 법과 제도를 보완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래도 계속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교권 보호, 전세사기 모두 20년 전에도 있었어요.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는 건 법과 제도만의 문제가 아닌 거죠. 법과 제도가 아니라 이걸 운영하는 사람이 바뀌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했는데, 그 해법을 2010년에 이태석 신부님의 삶에서 찾은 거예요."
영화가 개봉됐는데,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울어요. 왜 우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전국의 극장을 찾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물어봤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하나는 반성의 눈물이었어요. 저분의 삶을 보니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 또 하나는 그리움의 눈물이었어요. 저런 리더가 우리 옆에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그리움과 반성의 눈물이더라고요.
20여 년 간 많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언론이 사회 문제를 그렇게 고발했는데, 사회가 더 나아졌느냐, 변하지 않은 거예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어요. 대형 사건이 날 때마다 법과 제도를 보완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래도 계속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교권 보호, 전세사기 모두 20년 전에도 있었어요.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는 건 법과 제도만의 문제가 아닌 거죠. 법과 제도가 아니라 이걸 운영하는 사람이 바뀌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했는데, 그 해법을 2010년에 이태석 신부님의 삶에서 찾은 거예요."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그는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의 작품들도 색깔이 달라진다. 날카로운 사회 고발에서, 우리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의 롤모델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다는 북유럽의 정치인들을 만나 이들과 우리가 무엇이 다른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이태석 신부님과 행복 지수 높은 나라의 존경받는 정치인들을 보니 공통점이 있었어요.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하는데요.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고, 공감하고, 경청하고, 약자들의 삶을 함께 느껴주고,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이걸 보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특별한 누군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거예요. 이걸 아이들에게 알려줘야겠다, 그래서 학교를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방송을 넘어,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학교를 찾아가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2011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12년째다. 세상을 바꾸는 건 아이들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학교에서 강의 요청이 오면 무조건 가요. 아무리 멀어도, 시골이어도 가요. 한 달에 20일은 강의를 나가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만나면 진정한 행복과 성공이라는 게 무엇인지 같이 이야기하죠. 아이들에게 '성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물어보면 처음에는 다들 '돈 많이 버는 거'라고 말해요. 온갖 매체에서 소개하는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화려한 삶을 보고, 돈이 곧 성공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아이들이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금 바뀌어요. 성공한 삶이란 이타심, 봉사하는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한 명의 아이라도 변한다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안 갈 수가 없어요."
"이태석 신부님과 행복 지수 높은 나라의 존경받는 정치인들을 보니 공통점이 있었어요.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하는데요.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고, 공감하고, 경청하고, 약자들의 삶을 함께 느껴주고,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이걸 보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특별한 누군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거예요. 이걸 아이들에게 알려줘야겠다, 그래서 학교를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방송을 넘어,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학교를 찾아가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2011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12년째다. 세상을 바꾸는 건 아이들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학교에서 강의 요청이 오면 무조건 가요. 아무리 멀어도, 시골이어도 가요. 한 달에 20일은 강의를 나가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만나면 진정한 행복과 성공이라는 게 무엇인지 같이 이야기하죠. 아이들에게 '성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물어보면 처음에는 다들 '돈 많이 버는 거'라고 말해요. 온갖 매체에서 소개하는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화려한 삶을 보고, 돈이 곧 성공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아이들이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금 바뀌어요. 성공한 삶이란 이타심, 봉사하는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한 명의 아이라도 변한다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안 갈 수가 없어요."
그는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가 뿌린 씨앗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직접 봤다. 이태석 키즈로 불리던 톤즈의 아이들이, 당시 초등학생 남짓이던 아이들이, 이태석을 닮은 의사, 언론인을 꿈꾸며 공부하고 있다. 씨앗은 열매가 되어 단단히 영그는 중이다.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곳에서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구 PD 역시 이태석 신부의 길을 이어 한국 사회에 씨앗을 뿌리는 중이다.
"이태석 신부님의 친형이신 이태영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의 삶을 영상으로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어요. 당시 이태영 신부님도 암 투병 중이셨거든요.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셨어요. 뭘 찍을까 생각하다 신부님 제자들 생각이 났죠. 그중 마틴이라는 제자가 에티오피아 약대를 졸업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축하를 해주러 가서 보니 형도 의사가 됐고, 의대를 다니는 친구도 있대요.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운 톤즈 사정을 아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었어요. 남수단 주바 국립의대를 갔더니 키가 190㎝에 가까운 건장한 청년과 여학생 십여 명이 반갑게 인사를 해요. 더 놀란 건 <울지마 톤즈>를 만들면서 인터뷰했던 아이들이 있는 거예요. '이태석 신부님처럼 살겠다'했는데 그 약속을 지킨 거예요. 믿기지 않았어요.
남수단 명문의대를 다니지만 제자들의 삶은 열악하더라고요. 학비를 벌면서 공부를 해야 하니, 왕복 4시간씩 걸어다니고, 책 살 돈이 없어 친구에게 빌려 공부를 하고요. 학비 지원을 약속하고, 신부님이 생전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한센인 마을에 가서 의료 봉사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다들 좋아해서 한국에서 약품, 의사가운을 준비해 갔어요.
한센인 마을은 2008년 이태석 신부님이 톤즈를 떠난 후 진료를 받지 못했어요. 한센인이 모여사는 라이촉 마을 주민이 40명 정도 되는데, 이날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200명이 넘었어요. 의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마을에서도 온 거예요.
진료를 하는데 제자들이 환자 손부터 잡는 거예요. 이상해서 물어보니 '이태석 신부님이 해오던 진료법'이래요. 환자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껴주는 거죠. 마음이 뭉클했어요. 한센인 환자들은 '이태석 신부가 돌아온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떠오른 단어가 '부활'이었어요. 종교적 의미의 부활이 아니라 사랑의 부활이라는 의미에서요."
이태석 신부의 제자들을 찾아 나섰다. 의사, 의대생이 된 제자가 50명, 공무원, 약사, 대통령실 경호원, 언론인까지 합하면 70명이나 됐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2020년 개봉한 <부활>이다. <울지마 톤즈> 이후의 이야기다.
"영화가 개봉 된지 삼년이 지났지만 학교에서 단체 상영 요청이 계속 들어와요. 소년병이던 아이들이 의사, 약사가 돼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죠. 이런 반응을 통해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이분의 삶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태석 신부님의 친형이신 이태영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의 삶을 영상으로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어요. 당시 이태영 신부님도 암 투병 중이셨거든요.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셨어요. 뭘 찍을까 생각하다 신부님 제자들 생각이 났죠. 그중 마틴이라는 제자가 에티오피아 약대를 졸업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축하를 해주러 가서 보니 형도 의사가 됐고, 의대를 다니는 친구도 있대요.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운 톤즈 사정을 아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었어요. 남수단 주바 국립의대를 갔더니 키가 190㎝에 가까운 건장한 청년과 여학생 십여 명이 반갑게 인사를 해요. 더 놀란 건 <울지마 톤즈>를 만들면서 인터뷰했던 아이들이 있는 거예요. '이태석 신부님처럼 살겠다'했는데 그 약속을 지킨 거예요. 믿기지 않았어요.
남수단 명문의대를 다니지만 제자들의 삶은 열악하더라고요. 학비를 벌면서 공부를 해야 하니, 왕복 4시간씩 걸어다니고, 책 살 돈이 없어 친구에게 빌려 공부를 하고요. 학비 지원을 약속하고, 신부님이 생전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한센인 마을에 가서 의료 봉사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다들 좋아해서 한국에서 약품, 의사가운을 준비해 갔어요.
한센인 마을은 2008년 이태석 신부님이 톤즈를 떠난 후 진료를 받지 못했어요. 한센인이 모여사는 라이촉 마을 주민이 40명 정도 되는데, 이날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200명이 넘었어요. 의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마을에서도 온 거예요.
진료를 하는데 제자들이 환자 손부터 잡는 거예요. 이상해서 물어보니 '이태석 신부님이 해오던 진료법'이래요. 환자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껴주는 거죠. 마음이 뭉클했어요. 한센인 환자들은 '이태석 신부가 돌아온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떠오른 단어가 '부활'이었어요. 종교적 의미의 부활이 아니라 사랑의 부활이라는 의미에서요."
이태석 신부의 제자들을 찾아 나섰다. 의사, 의대생이 된 제자가 50명, 공무원, 약사, 대통령실 경호원, 언론인까지 합하면 70명이나 됐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2020년 개봉한 <부활>이다. <울지마 톤즈> 이후의 이야기다.
"영화가 개봉 된지 삼년이 지났지만 학교에서 단체 상영 요청이 계속 들어와요. 소년병이던 아이들이 의사, 약사가 돼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죠. 이런 반응을 통해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이분의 삶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쯤에서 그의 소개를 다시 해야겠다. 이태석 신부 선종 이후, 그의 일을 이어가기 위해 '이태석 재단'이 만들어졌다. 초대 이사장이던 이태영 신부는 돌아가시기 전, 구 PD에게 재단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2020년 구 PD는 이태석 재단의 2대 이사장직을 맡았다.
재단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남수단의 한센인 마을과 학교 지원, 그리고 이태석 신부의 제자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한다. 구 이사장은 여기에 한 가지 사업을 추가했다. '이태석 리더십 아카데미'(대표 구진성)를 설립, 리더십 학교, 저널리즘 학교, 인문 강연 등을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을 알리기 위해서다.
지난 6월 이태석 리더십 학교 1기에 이어 10월 28일 2기를 시작했다. 스웨덴 5선 국회의원인 올레토렐 의원, 덴마크 브런더룹 자유학교를 설립한 모은스 고든밸레 교장, 스티븐 스웨거 코넬대 명예교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200여 명을 폴란드로 탈출시킨 아르멘 멜리키안 등을 강사로 초대했다. 한 명도 힘들 것 같은 인사를 네 명이나, '이게 가능한가' 싶은 수준이다.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와 영화를 번역해서 보내며 강의를 요청했어요. 신부님 삶에 감동해 선뜻 수락해주시더라고요. 특히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학교 설립 취지에 공감해 봉사의 마음으로 오겠다고요. 진심이 통했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설득할 때 진심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이 없구나'를 재단 일을 하면서 경험하고 있어요."
재단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남수단의 한센인 마을과 학교 지원, 그리고 이태석 신부의 제자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한다. 구 이사장은 여기에 한 가지 사업을 추가했다. '이태석 리더십 아카데미'(대표 구진성)를 설립, 리더십 학교, 저널리즘 학교, 인문 강연 등을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을 알리기 위해서다.
지난 6월 이태석 리더십 학교 1기에 이어 10월 28일 2기를 시작했다. 스웨덴 5선 국회의원인 올레토렐 의원, 덴마크 브런더룹 자유학교를 설립한 모은스 고든밸레 교장, 스티븐 스웨거 코넬대 명예교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200여 명을 폴란드로 탈출시킨 아르멘 멜리키안 등을 강사로 초대했다. 한 명도 힘들 것 같은 인사를 네 명이나, '이게 가능한가' 싶은 수준이다.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와 영화를 번역해서 보내며 강의를 요청했어요. 신부님 삶에 감동해 선뜻 수락해주시더라고요. 특히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학교 설립 취지에 공감해 봉사의 마음으로 오겠다고요. 진심이 통했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설득할 때 진심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이 없구나'를 재단 일을 하면서 경험하고 있어요."
"진심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이 없구나를 경험하고 있어요.
행복과 만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행복과 만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구 이사장 역시 이사장을 맡으며 급여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이태석 신부의 뜻을 잇기 위해 모인 후원금은 사업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사무실은 중헌제약에서 공간을 제공, 10여 년째 후원 중이다. 임대료가 들지 않는다. 딱 하나 외부에 맡기는 일이 있는데 회계 관리다. 후원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이것만큼은 외부 회계법인에 맡긴다.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니까요. 그동안 수많은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지금은 신부님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말과 행동의 일치가 중요한데 후원금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사용하는 것이 신뢰를 얻는 첫 걸음이라 생각했어요. 후원금은 1원이라도 헛되이 사용하지 않도록 외부 기관에 맡겼어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모금을 했는데, 생각지 않게 많이 도와주셨어요. 후원금 사용 결과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공개했고, 지난 7월에 의약품을 직접 우크라이나 병원에 찾아가 전달했어요. 국내에선 처음이었죠."
신뢰가 쌓여 이어진 인연은 '이게 된다고?' 싶은 일들을 만들어 내는 중이다. 이태석 리더십 아카데미의 구진성 학교장이 직접 우크라이나에 의약품을 들고 찾아간 인연으로 우크라이나에 이태석 재단 지부가 세워졌다. 뜻이 맞는 이들이 자원해 뉴욕, 광주, 충주, 양평 등 전국 각지에 지부가 세워졌다. UN에 NGO 등록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등록이 완료되면 본격적인 국제 구호사업을 펼칠 수 있다. 한국과 남수단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뉴욕,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 세계로 이어지는 중이다.
"지금 목표는 딱 하나에요. 대한민국을 사랑이 가득한 사회로 변화시키자. 강연을 다니며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요? 불행하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로, 이분이 리더로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들 안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어요.
저부터 달라졌어요. 어떤 선택을 할 때, 일을 할 때, 이태석 신부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돼요. 그럼 화를 낼 수가 없어요. 일이 잘 안돼도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해요. 그러면 화가 나지 않아요. 웃으면서 넘어가요. 옛날에는 안 그랬죠. 이태석 신부님을 알지 못했다면, 고발, 불신, 분노에서 끝났을 텐데, 그를 통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예요.
이태석 신부가 대단한, 영웅적인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우리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다,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경청과 공감, 실천, 섬김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고요. 아이들에게도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고맙습니다'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게 이태석 신부처럼 사는 것이란 이야기를 하는 거죠."
구 이사장은 불교 신자다. 이태석 신부 생전에 단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다.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남겨둔 생전의 기록,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태석 신부가 남긴 기록과 실천한 삶의 궤적을 통해 그가 실천한 삶의 의미를 짚어볼 뿐이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고,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이태석 신부를 만나보지 못한 대부분의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제가 이태석 신부님을 선택해 그의 이야기를 알렸다고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신부님이 저를 선택하셨구나, 신부님이 나를 통해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직장 생활 바쁘고 힘들죠. 경제적인 것도 그렇고요. 그래도 생각을 조금만 바꿔봤으면 좋겠어요. 행복과 만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삶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행복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니까요. 그동안 수많은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지금은 신부님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말과 행동의 일치가 중요한데 후원금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사용하는 것이 신뢰를 얻는 첫 걸음이라 생각했어요. 후원금은 1원이라도 헛되이 사용하지 않도록 외부 기관에 맡겼어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모금을 했는데, 생각지 않게 많이 도와주셨어요. 후원금 사용 결과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공개했고, 지난 7월에 의약품을 직접 우크라이나 병원에 찾아가 전달했어요. 국내에선 처음이었죠."
신뢰가 쌓여 이어진 인연은 '이게 된다고?' 싶은 일들을 만들어 내는 중이다. 이태석 리더십 아카데미의 구진성 학교장이 직접 우크라이나에 의약품을 들고 찾아간 인연으로 우크라이나에 이태석 재단 지부가 세워졌다. 뜻이 맞는 이들이 자원해 뉴욕, 광주, 충주, 양평 등 전국 각지에 지부가 세워졌다. UN에 NGO 등록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등록이 완료되면 본격적인 국제 구호사업을 펼칠 수 있다. 한국과 남수단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뉴욕,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 세계로 이어지는 중이다.
"지금 목표는 딱 하나에요. 대한민국을 사랑이 가득한 사회로 변화시키자. 강연을 다니며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요? 불행하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로, 이분이 리더로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들 안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어요.
저부터 달라졌어요. 어떤 선택을 할 때, 일을 할 때, 이태석 신부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돼요. 그럼 화를 낼 수가 없어요. 일이 잘 안돼도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해요. 그러면 화가 나지 않아요. 웃으면서 넘어가요. 옛날에는 안 그랬죠. 이태석 신부님을 알지 못했다면, 고발, 불신, 분노에서 끝났을 텐데, 그를 통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예요.
이태석 신부가 대단한, 영웅적인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우리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다,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경청과 공감, 실천, 섬김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고요. 아이들에게도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고맙습니다'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게 이태석 신부처럼 사는 것이란 이야기를 하는 거죠."
구 이사장은 불교 신자다. 이태석 신부 생전에 단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다.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남겨둔 생전의 기록,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태석 신부가 남긴 기록과 실천한 삶의 궤적을 통해 그가 실천한 삶의 의미를 짚어볼 뿐이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고,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이태석 신부를 만나보지 못한 대부분의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제가 이태석 신부님을 선택해 그의 이야기를 알렸다고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신부님이 저를 선택하셨구나, 신부님이 나를 통해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직장 생활 바쁘고 힘들죠. 경제적인 것도 그렇고요. 그래도 생각을 조금만 바꿔봤으면 좋겠어요. 행복과 만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삶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행복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박보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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