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아이스크림을 팔고, 시간의 가치를 말합니다"

[인터뷰] 염리동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 박정수 대표

2024. 04. 08 (월) 09:55 | 최종 업데이트 2024. 04. 08 (월) 16:50
공덕 염리동 녹기 전에 박정수 대표
<녹기 전에>는 시간으로 빚은 가게입니다.
오래됐다는 뜻이 아니라 만들어진 동기 자체가 시간인 매장입니다.

아이스크림을 매개로 ‘시간’이라는 화두에서 파생된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품보다 의도가 훨씬 더 중요한 가게로서 세상에 이야기할 거리가 남아 있는 한
<녹기 전에>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이 무슨 소설처럼 낭만적인 소개인가.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자리 잡은 한 아이스크림 가게, 이곳의 이름은 <녹기 전에>다. 가게를 운영 중인 박정수 대표는 위와 같은 문장으로 <녹기 전에>를 소개한다. 매일 달라지는 메뉴를 이른 아침부터 성실히 준비하면서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일보다 시간의 가치를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전자과를 졸업하고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한 뒤,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리기로 결심, 2017년 <녹기 전에>를 시작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왜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냐는 물음에 ‘당시 제 생각을 구현할 수 있는 수단이 아이스크림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보통 직장은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선택한 동기를 묻는다면 ‘어릴 적 꿈이어서’ ‘답답한 직장생활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박정수 대표의 대답은 색다르다.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서 두려움 없이 시작한, 그가 쌓아 올린 아이스크림 가게 대표로서의 삶이 궁금해 직접 <녹기 전에>를 찾았다. 

그에게 근황을 묻자, 그가 쓴 책 ‘좋은 기분’이 올 1월에 세상에 나오며 겨우내 바빴다고. 아이스크림 가게 대표로서, 이제는 책의 저자로서 세상에 일과 삶에 대한 가치를 전하고 있는 그와의 대화는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일을 선택하고 있으며, 어떤 태도로 일을 대하고 있는가 돌이켜 보게 했다.
공덕 녹기 전에 박정수 대표
<녹기 전에> 박정수 대표
전기과 졸업한 대기업 청년은 왜 아이스크림을 팔기 시작했나

“박정수입니다. <녹기 전에>라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녹싸’(녹기 전에 사장의 줄임말, 그는 주로 자신을 녹싸라 소개한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2017년에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익선동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시작했어요. 코로나가 한창 심했던 2020년엔 공덕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제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8년 차가 되었네요.”

박정수 대표가 직장인일 때 이야기다. 그에게는 지독하게도 자신을 따라다니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바로 “죽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의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 치열한 고민 끝에 그는 ‘즐거운 기억’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즐거운 기억은 한 회사에 머물러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서는 만들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고.

어느 것에도 쉽게 질리곤 했던 그는 새로운 도전에 앞서 유일하게 질리지 않았던 두 가지를 골랐다. 바로 아이스크림과 라면이다. 이중 아이스크림이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시간’을 표현할 수 있어 선택했다고 말한다. 대기업이라는 안정적인 환경 안에 있으면서, 행복에 관한 치열한 고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하필 시간을 이유로 아이스크림을 선택한 걸까.

“저는 종종 안정적인 게 되려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직업이 안정적이다’라는 말이 언제까지 통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많은 직업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언제든 대체될 수 있고, 정말 나의 직업이 없어지면 한순간에 오갈 데가 없어지는 건 당연하거든요. 또 하나는 직업이 안정적이라고 했을 때 제 삶에서 그려볼 수 있는 미래가 뻔해 보였습니다. 중년이 되어 은퇴하고, 신문을 좀 읽다가, 운동도 좀 하다가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을 거예요. 전 사람이 뻔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안정적으로 사는 게 좋을 수 있겠지만, 직업이 안정적이어서 미래가 뻔하다면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불행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전 안정적이란 이유로 직업을 선택하는 게 살 떨릴 정도로 무섭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선택에 후회가 없어요.

우리의 삶은 유한합니다. 인간이 5천 년을 살 수 있다고 하면 지금 하는 대부분의 생각은 다 쓸모없을 수 있어요. 어떤 고민이든 5천 년을 살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냥 해보면 되죠. 하지만 인간은 그래봤자 100년 남짓 살아갑니다. 이 사실이 제겐 참 장난스럽다고 느껴져요. 영생을 살면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이 많은데, 100년을 살아야 하니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은 거죠. 이처럼 이 세상의 많은 일은 시간의 유한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한정된 시간 안에 얼마나 촘촘하게 행복을 누리며 사는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시간에 대한 가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다른 사람이 시간보다 다른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그 역시도 시간으로 연결할 수 있을 만큼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끼는 시간의 소중함을 동시대 사람들과 나누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아이스크림을 통해서 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녹기 전에>의 의도이자 존재 목적입니다.”
녹기 전에
아이스크림은 저에게 사물이나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작은 세계였고,
숫자 표시가 없는 시계였습니다.
실제로 집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은 시계와 아이스크림뿐입니다.

두 가지 다 ‘흘러서’ 시간을 알려줍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들은 항상 삶과 미래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도 넌지시 교훈을 건넵니다.

시간과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에 시간의 철학을 접붙인 것.
이것이 <녹기 전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아이스크림 가게를 시작하면, 제 과거 행적들이 다 모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침형 인간인데요. 만약 제가 카페 운영한다면, 밤 9시에 주문을 받고 밤 9시에 제조를 해야 합니다. 반면 아이스크림은 일찍 만들어서 숙성이나 프리징 과정 등을 거쳐야 해요. 그 전날 밤 혹은 아침 일찍 만들어야 하죠. 그래서 저의 성향과 잘 맞았던 거죠.

사실 처음부터 쉽진 않았어요. 제가 만든 첫 아이스크림이 기억납니다. 가정용 레시피북을 보며 만든 첫 결과물이었죠. 그걸 먹어본 형이 '이런 쓰레기를 어떻게 파냐'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만큼 실패도 많이 했지만, 당시 아이스크림 관련 책을 계속 읽으면서 아이스크림은 요리가 아닌 식품공학이라고 느꼈습니다. 유지방과 유단백질의 비율이 정해져 있고, 단백질과 지방층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요. 어는점이 내려가는 효과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아야 하죠. 제가 감각이 뛰어나지 않아 오히려 요리라고 하면 어려웠겠지만.(웃음) 아이스크림을 숫자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라 판단했습니다.”
녹기 전에
접객은 세상에 '좋은 기분’을 선사하는 일

무수한 연습한 끝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린 박정수 대표가 지금까지 개발한 아이스크림 맛만 450여 가지. 커피나 다른 디저트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아이스크림만 판매한다. 또 <녹기 전에>는 아이스크림뿐 아니라 손님들과 친밀하게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콘텐츠와 기획도 주를 이루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가게를 ‘입체적인’ 곳이라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아이스크림과 연결고리가 없는, 그러나 재미있는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가게를 중심에 두고 곳곳에 쪽지를 숨겨 손님들과 보물찾기를 하고, 사생대회와 악필대회가 열리고, 손님들과 나무심기 운동을 한다. 이런 아이디어가 자연스러운 이유는 박정수 대표가 <녹기 전에>를 아이스크림이라는 제품과 돈을 교환하는 장소로만 보지 않기 때문. 그는 이곳을 ‘좋은 기분’을 선사하는 곳으로 여긴다.
 
손님과 만나는 접점에 있는 전문 프런트가 되고 나서
예전에는 어렴풋하게만 느끼던 것들을 비로소 명확하게 깨닫기도 했는데요.
그중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일을 넘어
접객업 전반, 나아가 우리 사회의 활동,
즉 모든 인간사가 결국 ‘기분’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접객이란 일을 통해 손님에게 전해줄 수 있는 건 제품만이 아니라 마음이나 정서와 같은 개념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작은 가게로서 무기라고 생각하고요. 제품이나 인테리어를 멋지게 하는 가게들은 많죠. 하지만 작은 가게에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가치를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삶이라는 관점에서 멀리 내다보면, 인간에겐 마음이라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거 같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는 점점 더 숨 가쁘게, 빠르게 살고 있습니다. 이때 마음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녹기 전에>가 작은 안식처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곳에서 손님이 즐거움만 느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저녁 늦게 찾아가 아이스크림이 품절돼도 직원의 다정한 인사말에 그날의 기분이 달라질 수 있는 게,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사고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접객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은 박정수 대표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좋은 기분’을 위한 씨앗을 심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또 그 씨앗이 사회로 퍼져나가고, 다시 <녹기 전에>로 돌아오는 선순환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모든 기술은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하고, 모든 기술적 발전은 사람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건 결국 사람이잖아요. 생물학적인 인간 사이에 기계가 어디까지 침투할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에 대한 가치가 훼손되고 있고, 저는 그게 마음이 아픕니다. 호모사피엔스가 20만 년 전에 출현했어요. 우리는 그때부터 감정을 연대의 증거로 사용해 왔고,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한텐 마음이란 게 존재하고, 그 마음을 교류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이 필요한 거죠.

저는 접객을 하며 사람에게 늘 에너지를 받았고 삶을 배웠으며 이를 통해 전과 다른 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나누는 가치가 훼손되고 있는 것이 단순히 키오스크의 등장이나 기계의 잘못만은 아닐 겁니다. 여러 가지 경제나 사회적인 요소가 작용했겠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소비자가 사람이라면, 사람이 응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달라졌듯 접객이라는 것은 일하는 사람에게도, 손님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여긴 배움의 장에 가까워요. 대화를 통해 우리가 어떤 어제를 보냈고, 어떤 오늘을 보냈고, 그 사이 시간을 어떻게 메꿨는지 얘기하는 상황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가치가 참 많다고 느낍니다.”
공덕 녹기 전에 박정수 대표
160페이지의 채용공고, 한 권의 책이 되다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였던 <녹기 전에>가 더 널리 일과 삶에 대해 메시지를 전하게 된 건 박정수 대표가 인터넷에 독특한 채용공고를 올리면서다. 올 1월 세상에 나온 책 '좋은 기분'은 그가 동료를 찾기 위한 접객 가이드에서 시작된 글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가이드가 무려 1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다는 것. 그가 일을 하며 다져온 접객 철학이 상세히 적혀있다.

“세상에, 160페이지의 채용공고가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는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채용공고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거기에 접객에 대한 단단한 생각이 담겨 있어 마케팅과 브랜딩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책 좋은 기분
2023년 5월에 올라온 채용공고 속 접객 가이드
이 문서는 책 '좋은 기분'의 토대가 되었다. (자료=녹기 전에 인스타그램)
채용공고 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 짧은 회사소개와 주요업무, 자격요건, 우대사항이 적힌 목록 한 페이지. 우리가 으레 떠올리는 채용공고의 모습이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의도가 분명한 가게에서 단 몇 줄의 목록으로 그 의도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태도는 쉽게 프로그래밍되거나 내재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중심부로 향하기 위해
먼 길을 걸어가듯 많은 문장을 할애해야 했습니다.
 
“그 글은 썼다기보단 ‘쓰여졌다’에 가깝습니다. 매일 출근 전 일을 대하는 제 생각을 써 내려갔던 글인데요. 완성본을 올릴 때 다운로드와 인쇄가 불가능하도록 설정해 놓았었거든요. 한 분은 공고를 내리기 3시간 전에 그 문서의 존재를 알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3시간 동안 빠르게 정독했다고 하더라고요. 제 생각엔 제한이 있으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희소성 때문이랄까요.(웃음)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이 채용 공고를 봤다고 인사해 주셔서 신기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으로 모든 직업은 텍스트로 통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이스크림은 글자와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거든요. 글자가 한 자도 필요 없는 일요. 그런데 이 문서가 널리 퍼지면서, 모든 직업은 그 일의 함의를 드러낼 수 있는 텍스트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이게 콘텐츠가 될 거라고, 범 대중성을 가진 책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요. 뭐가 됐든 본업과 무관한 일은 본업에 덧붙이면 새로운 힘이 생기는 걸 느꼈습니다. 저희가 장사가 안 되거나, 힘든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방식을 통해, 이렇게 <녹기 전에>가 알려지는 미래가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책을 통해 저희를 알게 된 사람들도 많아지고, 유입도 많아졌어요. 지금도 뺨을 때리면 깰 것 같은 꿈 같달까요.”

그렇게 꿈 같은, 새로운 페이지를 연 <녹기 전에>는 오늘도 학생과 직장인과 동네 주민,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좋은 기분'을 선사하고 있다. 유명세에도 여전히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자신을 깊이 탐구하고, 한계를 인정하며, 가닿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일한다. 유행이나 트렌드를 따르기보다 일을 통해 ‘시간’의 가치를 알리고 우리의 한정된 삶 안에서 한 번이라도 더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그의 일이라 여긴다.

저희는 사람들에게 '빨리 달리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팀은 아닙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줄 수 있으면, 좀 더 건전하고 건강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돕는다면 그것만큼 뿌듯한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생각이 저희의 동력 같아요.”
장경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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