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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에 물이 많으십니까? 그렇다면 합격”

[논픽션실화극장] 샤머니즘 ② 면접 보러 갔더니 “몇 시에 태어났어요?”

2020. 06. 02 (화) 11:58 | 최종 업데이트 2021. 12. 09 (목) 09:26
※ 다음 글은 잡플래닛에 남겨진 리뷰와 못다한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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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사주에 물이 많으십니까? 그럼 우리 회사로 오세요. 사주에 물이 많은 당신, 우리 대표님이 원하는 인재십니다!
우리 회사 입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주’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 생년월일시, 사주요. 회사가 점 보는 곳이나 무속신앙 관련된 곳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대표님은 우리 회사를 소개할 때 ‘첨단’, ‘IT’, ‘소재’, ‘화학’ 같은 단어를 강조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면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역시 ‘사주’죠. 첫 면접 보던 날이 떠오르네요. 가장 어려웠던 질문은 ‘몇 시 몇 분에 태어났느냐' 였습니다.
회사에 도착하자 마자 이력서를 자필로 다시 쓰라고 하더군요. 이미 제출한 이력서를 직접 손글씨로 써서 내라는 것도 이상했는데, 다시 받은 이력서에는 ‘생년월일시’를 쓰는 칸이 있었어요. 이게 회사 면접에서 흔한 질문은 아니잖아요.
이상했지만, 설마 ‘사주’ 같은 것을 보겠다고 태어난 시와 분을 적으라고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회사가 면접자 사주를, 아니 꼭 회사가 아니어도 남의 사주를 함부로 보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회사 양식에 따라 5~6장 정도 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등을 1시간쯤 걸려 손으로 다시 적어 냈습니다. 그리고 면접이 시작됐죠.
“부모님이 뭐하세요? 집안에 재산은 얼마나 되죠?”
부모형제 직업이 무엇인지, 가족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빌라에 사는지, 집안 형편은 어떤 지, 초중고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고등학교 때 반에서 몇 등이나 했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색깔은 어떤 색인지, 밥 먹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각종 성향까지….
이게 점을 보러 온건지, 소개팅에 나온건지, 심리테스트를 받는건지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면접만 한 2시간을 봤다니까요. 이 수십가지 질문에 다 대답하고, 저도 딱 한가지 물어봤습니다. 워낙 개인사에 대해 많이 물어보셔서, 가족같은 분위기를 원하는 건가 싶어서 저도 허심탄회하게 ‘연봉이 얼마나 되나요’라고 물었는데… 회사가 성장하면 나중에 인센티브로 보상하겠다고 하시네요. 결국 연봉이 얼마인지는 제대로 듣지 못한거죠.
지난한 과정 끝에, 사주가 나쁘지 않았는지 저는 합격을 했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출근을 하고 나서야 면접 때 받은 질문들의 출처를 알 수 있었습니다. 대표님이 무속신앙을 매우 좋아하시더라고요. 왠만한 직원 연봉보다 많은 돈을 점 보는데 쓰시는 것 같았어요.
처음 출근하면서 주차장에 연못이 눈에 띄었어요. 뜬금없이 주차장 한가운데 연못이 있는데,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무속인이 회사에 물이 없어서 안 좋다고 했다네요. 그래서 주차장 가운에 땅을 파고 연못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역시나 같은 이유로 사주에 물이 많은 직원을 선호하신다고 하네요.
직원들이 회사와 궁합이 안 맞아서 일까요? 우리 회사는 퇴사율이 높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기업 정보 플랫폼을 보면 퇴사율이 50%가 넘습니다. 실제로 퇴사와 입사가 반복되고 있죠. 직원들의 입·퇴사가 잦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대표님은 그 이유를 아실까요?
대표님, 점 보느라 드는 비용의 일부라도 직원들에게 베풀면 더 나은 회사가 될 것 같습니다. 사주궁합보다 직원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는게 어떨까요?
박보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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