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잡플래닛에 남겨진 리뷰와 못다한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자, 이 정도로 하죠. 기도하고 마칩시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교회에 온 줄 알았다. 분명 면접을 보러 온 건데. 내 앞에 앉은 저 사람은 목사님이 아니라 회사 대표인데. 축복, 어린 양, 하나님의 나라… 종교적 언어로 점철된 기도를 들으며 상념에 잠기고 말았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 엔지니어 직무에 지원했고, 서류와 1차 면접을 통과했다. 1차는 말 그대로 실무 면접이라 별다를 게 없었다. 최종 면접은 대표와 일대다로 진행한다기에 전형적인 '임원 면접'이겠거니 생각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면접장에 들어서자 한 중년 남성이 면접자들을 반겼다.
"어서들 와요. 편히 앉읍시다."
인상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면접이 어렵지 않겠다'는 짐작은 종교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물거품이 됐다. 지원자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키고는 가족 관계를 묻더니, 대뜸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 아닌가. 업무와 관련 없는 가족 관계에 관한 질문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갔다' 싶었다.
"A 씨는 교회 안 다닌다고? 우리 회사는 종교 색채가 강해요. 교회 안 다니면 힘들 수도 있어. 입사하면 교회 다녀 봐요. 신우회도 잘돼 있으니까 참석하면 좋겠네. 주말에 같이 봉사도 가고 말이야. B 씨는 교회 다닌다고? 그럼 성경 말씀은 잘 알겠네. '어린 양'이라는 말 알아요? 신약성경 복음서에 보면 말이야…"
어린 시절 교회를 꽤 다녔지만, 머리가 굵어지자 종교에 매력을 못 느껴 무종교인으로 산 지 오래다. 물론 특별한 반감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면접장에서 설교 한 시간은 고역이었다. 기승전'종교'를 한 시간 동안 들으면 누가 안 그러겠는가.
직무 이야기는 '1도' 없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없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장황히 설교를 늘어 놓는 바람에 집중력을 잠깐 잃은 사이 '요즘 젊은이들 말이야'로 주제가 넘어갔다. 주제 전환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유려한 말솜씨다.
"요새 '워라밸'이란 말이 있던데? 젊은이들은 이런 거 따지면서 일하면 안 돼요. 시간 있고 체력 있으면 저녁에도 열심히 해야지. 나는 엔지니어들 야근해도 수당 안 줘. 열심히 하면 자기 실력 오르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왜 돈을 줘."
아직 입사하지도 않았는데 열불이 난다. 대표님 만지시는 그 돈이 다 엔지니어들 피 땀 눈물 아닙니까. 대표님 믿으시는 그분도 목수였다지 않습니까. 예수가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답니까. 이 사람, 예수가 엔지니어로 일한대도 야근수당은 커녕 눈길도 안 줄 위인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여러분, 입사하게 되면 웃으면서 인사합시다. 같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봅시다. 자, 이 정도로 하죠. 기도하고 마칩시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오늘만 해도 몇십 명은 면접을 볼 텐데, 이걸 족히 열 번은 하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대표라는 사람도 참 대단하다. 면접은 기업이 면접자를 평가하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면접자가 기업을 평가하는 자리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나는, 좋은 평가를 해 드리긴 어렵겠다.
"띠링."
면접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 즈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XXX님은 OOO 신입사원으로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최종 입사일은 #월 ##일입니다…"
합격 문자를 받고 기쁘지 않은 건 처음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연락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부리나케 전화해 입사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인사담당자는 수화기 너머로 안타까운 내색을 했지만, 내 마음은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여러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녔고 이직도 여러 번 해본 나지만, 최종 합격까지 하고 포기한 회사는 또 처음이었다.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이내 나 대신 입사할 누군가가 괜히 걱정돼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대표가 믿는 신이 존재한다면 이 기도도 듣겠지 싶어,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기도했다.
'이 회사에 입사할 그분을 지켜 주세요.
야근수당도 다 받고, 종교 강요도 안 당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누릴 것 다 누리며,
들숨에 건강을, 날숨에 재력을 얻게 해 주세요.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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